어렸을 적 나는 친할머니 손에 자랐다.

내가 5살이 되는해 나를 키워주셨던 할머니께서는 정말 이쁘게 생긴 언니를

해외에서 돈벌러갔다가 온  엄마라고 소개했다. 

하지만 난 본능 적으로 친엄마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던것 같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초등학생이 됐을 무렵

해외에서 돈을 벌러간 엄마가 영어를 못한다는 사실과 엄마 여동생의 첫아이를 

돌보는 모습에 보고 나의 친엄마가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아무리 내가 어렸을 적에 할머니께 맡겼다고 해도 아이를 안을 때 두려워했으며,

기저귀 하나를 못 가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난 그 누구에게도 물어볼 수 없었다. 

우리 친할머니가 나를 키우실때 가장 중요시 하는 것이 정직이었다.

그리고 가장 싫어하는 것이 거짓말이었다.

그런 할머니께서 내게 3년간 거짓말을 한다는 것과 모든 어른들이 거짓말을 한다는 건 내가 알면 안되는

엄청난 진실 숨기고 있었다는 사실을 어린 나이에 눈치챘기 때문이다. 

 

한글을 잘 읽을 무렵 위의 나의 심증을 뒷받침하는 증거까지 나는 발견하였다. 

할머니 장롱 속 아버지의 이혼서류였다. 

그 이혼 서류에는 지금의 엄마의 이름이 아니라 다른 분의 이름이 있었다.

할머니께서 내가 이혼서류를 보는 것을 보고 놀라셨지만, 할머니와 우리 가족을 위해

난 한글을 못읽는 척하며 할머니에게 "할머니 이종이는 뭐야? 색칠공부해도되?"라며

할머니께 거짖말을 해야 했다. 

새엄마는 무척이나 아름다우셨다. 아담한 체구에 긴생머리 생기있는 얼굴에 멋스러운 화장까지

그래서 난 엄마가 학교에 오는 것이 좋았다. 하지만, 학급 친구들은 너와 엄마가 하나도

닮지 않았다며 놀렸다.

그래도 나는 우리 아빠닮아서 그렇다면서 새 엄마를 자랑스러워했다. 

하지만 이런 불편한 이야기는 어린 아이들 입에서 뿐만 아니라 친구 엄마들 사이에서도 

이상한 소문이 되어 돌아다니곤 했다. 

 

심지어 어떤 아줌마는 " 너희 엄마 친엄마 맞니?"라고 물어보기도 했다. 

 난 진실을 알고 있지만 ,뻔뻔하게 " 네 "라고 거짖말을 했다. 

 우리 아빠와 새엄마 사이에는 아이가 생기지 않있다. 그래서 친할머니께서 

탐탁치 않아하셨고, 심지어 내가 새엄마와 함께 있는 것도 싫어하셨던 것 같다. 

그래서 우리 부모님은 시험관 아이를 4차례 시도했다.

그게 그렇게 힘든 것인지 그당시에 몰랐다.

 

비용도 많이들고, 여자가 매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고모들 역시 새엄마를 탐탁치 않아했으며,

이러한 이유로 내 동생을 낳는 것을 포기한 눈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새엄마도 참으로 힘들엇을 것 같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흘러 내가 중학교 2학년때 엄마와 같이 운동을 다녔다.

당시 나는 소아비만이었던 나는 엄마와 같이 에어로빅을 다녔다.

방학에는 아침에 학기 중에는 저녁시간에 운동을 같이 했다.

그런던 어느 겨울 방학때 나는 타올을 챙겨 나오는 것을 깜박 잊고 가지고 가지 않았다.

이사실을 운동이 끝나고 샤워를 하고 나서야 알았다. 

그래서 당시에 나는 알몸으로 엄마한테 엄마 나 수건 안가져왔어"라고 말했는데

"넌 니꺼 써 난 남이 내꺼 쓰는 거 싫어 특히 수건!" 내게 쏘아 붇혔다.

나는 그순간 너무 창피하고 상처받았다.  그 길로 나는 물을 뚝뚝 흘리며 옷을 갈아 입고

매서운 바람이 부는 에어로빅 학원을 나서  혼자서 우리집 1층에 있던 친 할머니 집으로 갔다.

엉엉 울면서,,," 그리고 소리치며 말했다 "할머니 지금 엄마 친엄마 아닌 거 나 알아! 

" 그여자 나가라고 해!"라고 소리치며 말했다. 근데 그순간 엄마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난 잘됐다 싶었다. 그리고 난 우리 집이 아니라 할머니 댁에서 방학을 보냈다

일주일 쯤 지났으려나? 중국에 가셨던 아버지께서 급한 목소리로 얼른 집에 올라가봐! 라고 하셨다.

난 가기 싫었지만 아버지의 심상치 않은 목소리에 올라가보았다. 

그때 내가 올라간 우리집에는 낯선 공기로 가득했다. 그리고 식탁 위에는 

새엄마가 쓴 편지가 올려져 있었다.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힘들어서 나간다는 내용이었다. 

저녁에 아버지는 초점잃은 눈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엄마가 나간 이유가 

나때문이라고 화를 내셨다. 하지만 난 나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있었다. 

아버지의 욱하는 성격과 사춘기딸, 꼬장 꼬장한 시어머니, 그리고 하이에나 같은 

고모들 어려가지 요인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날 저녁 부터 중학교 2학년 겨울방학이 끝나는 내내 아빠와 나는 새엄마를 찾아 다녔다/

기차역 부턱 터미널까지 정말 비참했다.

그리고 온 친척들은 기대 가득한 눈으로 우리 가족이 산산조각 난 것을 구경하러 

모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순간에도 기죽기 싫어서 애써 웃고 장난쳤다.

근데 아빠는 그 모습마저 맘에 들지 않았는지

너는 웃음이 나냐면서 나를 나무랐다. 근데 속으로 나는

" 우리 가족이 산산조각 난 모습을 구경하러 온사람들에

기대하는대로 우울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다고" 말했다. 

무너지는 아버지를 보고 나는 나라도 정신 차려서 저 사람들 보란 듯이 잘사는 모습 

보여줘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중학교 3학년으로 올라갔다.

조그마한 동네에 우리 새엄마의 가출 소식은 일파 만파 퍼져 우리 학교까지 소문이 났다. 

친구는 우리 엄마의 부재를 물었지만, 난 외할머니 댁에  가셨다고 둘러댔으며,

나중에는 더이상 묻지 않았다.

우리아빠보다 더 걱정이 되는 건 바로 우리 친할머니였다. 일도 않하고 새엄마를 찾으러 다니는 

아버지때문에 할머니께서는 정신이 왔다갔다 하셨다. 그리고는 신장에 문제가 생겨

손과 발이 코끼리처럼 부어올랐다. 나는 이상황에 할머니께서 돌아가실까봐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고모들께 연락하려 했으나 할머니는 지금 이런 상황에 고모들이 알면 나를 소년원에 보낼 꺼라며

극구 말리셨다. 그러다가 할머니의 손과 발이 말도 안되게 붓고 할머니께서 거동도 힘들어져 결국엔

막내고모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명의 고모들을 득달같이 달려왔다. 그리고 할머니의 상태를 보고 

니가 할머니까지 잡아 먹으려고 그러냐고 나를 혼내기 시작했다. 

아무도 나를 위로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나 자신을 위로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나는 나를 다독이며 자랐다

그러나 그 새엄마를 용서할 수 없었다

지난 14년 동안 매일 꿈에 나왔다. 그러다 14년이 지난 오늘 

우연히 사용하지 않았던 이메일 계정에 그 새엄마의 이름이 보였다.

심지어 주소도 있었다. 연락처도 있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욕을할까 메일 도용으로 신고를 할까?

고민하다가 문득 이분도 힘들었겠다 여자로서 이혼녀로서 나만큼 

힘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들었고, 용서하자고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정중하게 안부를 묻고, 이메일계정을 바꿔 달라는 문자와 함께 나의 원망도 

멀리 보내버렸다. 

근데 눈물이 터져나왔다. 마침내 내 14년의 마음속 응어리가 풀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내가 그 분을 용서하기로 한 이유는 

과연 인생을 살아가면서 진심어린 용서를 하는 것과 받는 것이 쉽지 않은 

기회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사람은 내가 자기를 용서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

오히려 오늘 나의 문자가 안좋았던 기억을 되살렸을 수도 있지만 난 

오늘 진심어린 용서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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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칵이 담터댁

사진을 취미로 시작한 28살 어른이 입니다. 즐검게 하루하루를 담아보는 습관을 가져볼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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